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다케다 신겐 (문단 편집) == 평가 == [[파일:attachment/다케다 신겐/295.jpg]] [[야마나시현]] [[고후시]]에 있는 동상. [[코후역]]에서 내리면 볼 수 있다. 고후시는 옛 다케다 가문의 본거지가 있던 곳으로 지금도 이곳에 가면 다케다 가문의 흔적이 시 곳곳에 남아 있다. [[센다이]]가 [[다테 마사무네]]를 마스코트로 활용하는 것처럼, 아예 이 지역에서는 다케다 가의 슈퍼스타나 다름없는 신겐을 지역의 '마스코트'로 활용하는 듯.[* 대부분의 유명한 지방 도시가 그 영주를 일종의 마스코트로써 활용한다.][* 쇼군 2: 토탈 워에서도 다케다 가문 승리 시 이 동상이 나온다.]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에서는 신겐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부하가 조금이라도 실패를 하면 바로 그를 죽여 없애버린다. 손실을 거의 내지 않고 적국을 정복하는 등 전술에 뛰어나며, 유구르타[* 공화정 로마와 전쟁을 벌여 패배하고 죽은 누미디아의 왕. 유구르타와 신겐은 여러모로 비슷하다. 유구르타도 로마인을 살육하는 등 잔인한 행동을 했다. 누미디아는 기동력이 좋고 적을 잽싸게 견제하는 기병대로 유명했으며 신겐은 카이 기병(전국시대의 기병은 충격기병이 아니다)을 이용한 기동유격전술을 사용했다. 유구르타는 로마 원로원에 뇌물을 마구 뿌려 사람들을 매수한 일화가 있고 신겐은 카이의 고슈킨 황금을 비슷한 용도로 사용해 적극적으로 시나노 각지의 영주들을 포섭해 세력을 불렸다. '''그리고 둘은 역사의 패배자다.''']와 비슷하다. 매일같이 우상[* 불상을 의미. 프로이스는 선교사라서 불교나 다른 신앙에 극도로 적대적이다.]에 기도를 올리며, 승복을 즐겨 입고 전장에도 수백 명의 [[승려]]를 대동하는 등 신앙이 독실해 보이지만, '''사실 그 신앙은 타국을 정복하기 위한 정치적 도구에 불과하다.'''[* 실제로도 신앙을 여러 모로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노부나가 포위망을 결성하기 위해 히에이 산의 불교 세력과 동맹을 맺기도 했고, 혼간지 켄뇨와는 동서지간이었다.] 스스로 '천태종 좌주 사문 신겐'[* 좌주는 불교의 강사, 사문은 수도자를 말한다.]이라고 칭한다. 주로 무능해진 기존의 슈고 다이묘들을 신흥세력인 센고쿠 다이묘들이 하극상을 일으켜 내쫓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센고쿠 시대의 특징인데, 다케다 가문은 특이하게도 슈고 가문으로, 상실돼가는 카이 슈고 다케다 가문의 권위를 아버지 노부토라와 신겐의 대에 재건한 것이다. 신겐은 다른 센고쿠 중-후반기 다이묘들이 그렇듯이 자신의 대에 폭발적인 영역 확장을 이뤘는데, 신겐의 개인적 카리스마로 느슨한 호족 연합체 조직을 이끄는 형태였기 때문에 중앙집권화가 진행되지 않았고 외교 실책 등 멸망의 원인이 생긴 것 역시도 신겐 대이기에, 신겐의 업적에는 명백히 센고쿠 다이묘로서의 한계가 존재한다. 픽션에서는 주로 아들인 카츠요리의 실책과 무능 탓으로 돌리지만 현실적으로는 아버지 대에 누적된 모순점들을 아들이 해결하지 못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사실에 가깝다. 야마나시현을 넘어서 일본의 전국적으로 지명도가 높은 전국시대 [[다이묘]]이고 각종 만화나 게임, 소설 등에서는 강력한 포스를 지닌 거물로 등장하지만 실상을 보면 결국 죽을 때까지 지방영주의 한계를 넘지는 못했다. 이는 다케다 가 영주가 지방 호족들간의 연합 맹주 격에 불과했던 탓도 있고 결정적으로 다 이긴 전쟁에서 신겐이 허무하게 급사한 것도 있다. 신겐이 급사하지 않고 전쟁에서 승리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갑양군감》은 [[모리 모토나리]], [[오다 노부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 [[우에스기 켄신]]은 일본 최고의 4대 무장이며 이에 비견할 만한 무장은 중국을 뒤져봐도 없다고 극찬했는데, 이 뒤에 '''그런데 신겐은 그런 얘들보다 좀 더 잘났다'''라고 은근히 돌려서 신겐 신격화를 펼치고 있다. 텐모쿠산 전투로 다케다 가가 멸망하면서 오다 가에 의해 다케다 일문들이 죽임을 당했지만 그래도 가문이 단절되지는 않았다. 차남 운노 노부치카 가계가 현재 카이 다케다 가 종가로 인정받고 있다. 노부치카는 다케다 가 멸망 때 [[자살]]했지만 그의 아들인 노부미치와 노부마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보호를 받지만 후에 오쿠보 나카치카 사건에 연루되어 먼 [[섬]]으로 유배된다. 이후 유배가 풀렸을 때 노부미치는 사망하고 20대의 노부마사는 70대 할아버지가 된 상태였는데 노부마사는 결혼하여 아들 노부오키를 얻었으며 후에 [[다이쇼 덴노]] 때 노부치카 가계를 카이 다케다 가 종가로 인정하였다. 그외에 7남 다케다 노부키요는 누나의 남편인 [[우에스기 카게카츠]]에게 도망쳐서 살아남아 요네자와 다케다 가를 이루었다.[* 다케다 연고자들의 친목 도모 및 기념 모임인 다케다 구온회에 의하면 노부키요와 노부치카의 가계 사이에서 어느 쪽을 카이 다케다 가의 종가로 인정할 지를 놓고 다이쇼 연간에 치열한 일대 논쟁이 일었다고 하며 결론적으로 노부치카의 가계가 종가로 인정되었다고 한다. 격한 표현을 삼가는 [[일본인]]이 이렇게까지 표현했다는 것이 그 갈등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방증하는 셈. ] 여기에도 1가지 꼬이는 것이 있는데 카츠요리 등이 몰살되자 다케다 가문을 배신한 가신 아나야마 노부타다가 아내가 신겐의 딸이라는 점을 이용해 아들 아나야마 카츠치요를 다케다 노부하루로 [[개명]]시켜 다케다 가문을 잇게 했다. 신겐의 외손자이자 다케다 가문의 계승자였던 노부하루는 15세에 [[천연두]]로 죽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5남 노부요시를 노부하루의 사후 [[양자(가족)|양자]]로 삼아 다케다 가문을 이어보려고 했으나 노부요시도 자식없이 20세로 죽어 가문을 다른 사람들이 가져가려던 노력은 실패하였다. 신겐과 역대 다케다 가문의 영주들이 성 대신 살던 저택인 츠츠지가사키 저택은 현재 다케다 신사가 되어서 참배객과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